격동하면서도 사상이 분출한 시대이다. 명리학은 이 시기에 「술(術)」에서 「이(理)」로의 승화를 이루었고 수많은 전문 용어가 등장하였다.
남조의 학자 유준(劉峻)은 관로가 재주를 품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변명론(辨命論)』을 지어 「명」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죽고 사는 것, 귀하고 천한 것, 가난하고 부유한 것,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것, 화와 복 — 이 열 가지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이는 왕충 이후 운명의 본질에 대한 가장 깊은 철학적 탐구였다.
북조에서는 술수의 응용이 더욱 넓어졌다. 북위의 손소(孫紹)는 녹명(祿命)을 추산하여 「하음지변(河陰之變)」의 생존자를 정확히 예언하였다. 북제의 술사 위녕(魏寧)은 무성제(武成帝)의 명을 볼 때 「올해 묘(墓)에 든다」와 같은 전문적인 단언을 직접 사용하였다. 당시 장생십이궁과 오행의 생왕묘절(生旺墓絶) 이론이 이미 실전에서 무르익어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도홍경(陶弘景)의 『삼명초략(三命抄略)』 등(비록 전하지 않으나)도 전문적인 명리 저작이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증명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