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가 사라지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건국 이후 대륙에서 명리학이 잠잠해진 사이, 그 불씨는 홍콩과 대만에서 다시 타올라 크게 번졌다. 이 단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의고(疑古)」와 「과학화」이다.
초기의 추문요(鄒文耀)는 항공 엔지니어라는 배경으로 고서의 오류를 과감히 의심하며 「시공제명식(時空制命式)」을 제시하였다. 오준민(吳俊民)은 현대적 교수법을 들여왔고, 업계를 뒤흔든 「동지 연주 교체」 대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중후기의 양상윤(梁湘潤)은 유파 다툼에서 벗어나 「대주기(大週期)」라는 역사관의 높이에서 고법을 정리하여, 청대 이전에 사라진 「자평모법(子平母法)」을 발굴해 냈다. 사형거사(司螢居士)와 광련(光蓮) 등은 기법을 극도로 정밀하게 다듬어 「유년 오행 기흘(起訖)」 법칙을 제시하고, 길흉의 응기(應期)를 유월(流月)은 물론 유일(流日)까지 수치화하였다.
같은 시기 육치극(陸致極)은 시스템 이론을 들여와 「일간과 격국의 이중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홍콩의 우달인(尤達人)과 진심양(陳心讓)은 통계학과 실험 법칙(예컨대 대운 순행설)으로 명리학을 개혁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는 명리학이 강호의 비술에서 학술 연구와 실증 논리의 새 시대로 나아갔음을 알리는 표지이다.
